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한옥마을 (문단 편집) == 유래 == [[http://hanok.jeonju.go.kr/|공식 홈페이지]]. [[을사조약]](1905년) 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주~군산 가도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 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태조로에서 보면 [[경기전]]이 속해있는 방면의 [[한옥]]들은 일식가옥에 기와를 얹어놓은 느낌이 강하고, [[전동성당]]이 속해있는 방면의 한옥들은 흔히 알고있는 한옥 느낌을 보여준다. 이는 현재의 태조로가 전주부성 성벽이었고 경기전 방면은 성벽 내부, 전동성당 방면은 성벽 외부였음을 생각하고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현재 오목대 관광안내소가 위치한 곳에는 마구간과 기마경찰대가 있는데 이곳이 옛날 일본군 기마대가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 역시 성 내부 방면에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기전]] 동문방향에 위치한 경성house 숙박업소 역시 [[일본 경찰]]관사를 리모델링한 건물이고, 골목길엔 아직 미처 [[리모델링]]이 되지 않았거나 기와만 얹은 [[적산가옥|일본식 가옥]]들도 제법 보인다. 사실 일본식 가옥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건물들은 대부분 향교길 방면에 위치해 있으나, 정작 향교길은 향교 외 관광지로서의 상품성은 떨어져서 대부분 임대나 매매 플랜카드가 걸려있는 실정이다. 전주부성 복원계획으로 오히려 일식가옥지역들이 혜택을 받게 된 것을 보면 일종의 아이러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